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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가문화]10살, 기억 속의 태극기 - 김양순 기자
21-09-23 15:57 371회 0건

나의 10살에 무서웠던 기억으로 지금도 6·25 때 꿈을 꾼다.

나는 1950년 6월 25일, 경기도 양주군 은현면에 있는 은현국민학교 3학년생이고 나이는 10살이었다. 그런데 낮이었는데 보따리를 이고 진 사람들이 줄을 지어 길을 가고 있었다.

우리 집은 국도가 눈에 보이는 곳이었는데 사람들이 피난을 가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어려서 피난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아마도 그때는 피난이 소풍 가는 것쯤으로 생각을 했다. 그래서 마당에서 사람들이 길을 가는 것을 보면서 우리도 빨리 피난을 가자고 졸랐다.

엄마와 아버지는 피난 보따리를 싸시는데 자꾸 졸라대니까 큰엄마와 할머니를 따라서 가면 곧 따라오신다고 해서 오빠, 언니, 나, 여동생, 4살짜리 남동생 이렇게 다섯이 큰엄마와 할머니를 따라갔다. 언니는 보따리를 하나이고 나는 동생을 업고 가는데 처음에는 소풍 가는 것 같이 즐겁고 좋았다. 그런데 가다가 소나기를 만나서 옷은 젖고 띠도 없이 동생을 업었으니 손이 아파서 도저히 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언니한테 보따리하고 동생을 바꾸어서 내가 보따리를 이고 동생은 언니가 업고 가는데 무거워서 도저히 발을 떼어 놓을 수가 없었다. 다시 언니하고 동생을 바꾸어서 보따리를 언니에게 주고 내가 동생을 업고 가는데 손마디가 아파서 갈 수가 없었는데도 그냥 어른들을 따라서 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 부모님은 아이 다섯을 먼저 보내고 보따리를 싸서 샛길로 가서 우리를 만나려고 했는데 그것이 덕정리에서 의정부까지 갈 때까지 만나지를 못해 아이 다섯의 이름을 번갈아 부르면서 사람 사이를 누비시다가 저녁때서야 우리를 만나셨다고 한다. 그러니 15살. 13살, 10살, 7살, 4살짜리를 모두 잃었으니 우리 부모님이 얼마나 헤매면서 아이 이름을 번갈아 부르시면서 이리 띠고 저리 띠셨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피난을 서울까지 갔는데 이미 한강 다리가 끊어져서 갈 수가 없다고 해서 광나루는 다리가 끊어지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우리 일행 모두가 무리를 지어서 광나루로 방향을 바꾸었다. 광나루 다리가 눈앞에 보이는 장소까지 갔는데 별안간 엄청나게 큰 폭발음이 들리면서 흙먼지로 인해 앞이 보이지 않았다. 어떤 대학생 같은 오빠가 다리가 폭파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모두 엎드려야 산다고 해서 모두가 땅에 엎드렸다가 한참 후에 일어나니 다리가 끊어져 버렸다. 그래서 우리 식구와 큰어머니, 할머니 모두가 다시 집으로 가게 되었다.

피난을 가지 못하고 집에 가서 사는데 어린 나이니까 무서운 것이 없고 학교도 못 다니게 되니까 노는 것이 일이었다. 그런데 며칠 지나니까 마을 입구에 다리가 하나 있는데 그 다리를 폭파하려고 비행기가 와서 폭격하는데 우리는 비행기에서 검은 똥이 떨어진다고 하면서 구경을 했다. 그런데 그 까만 것이 떨어질 때 그 폭발음이 얼마나 크고 무서운지 비행기만 뜨면 무조건 길을 가다가도 풀 속에 엎드려야 했다. 다리를 폭격한다고 하는데 논 가운데로 떨어져 웅덩이같이 파이면서 논에서 모를 내던 아저씨들이 돌아가셨다고 했다. 폭격을 여러 차례 해서 다리가 끊어졌다. 인민군의 보급품을 실은 자동차가 남쪽으로 내려오는 것을 늦추는 것이라 다리를 폭파하는 것이라고 했다.

인민군들이 마을에 들어와서 이승만을 따라간 사람들은 반동분자라 했다. 우리 마을에는 바닥 빨갱이라는 사람들이 없었는데, 옆 마을에는 있다고 해서 사람들이 숨어 지내는데 우리 고모부가 지소 주임을 했었다는데 그 당시는 경찰이 아닌데 고모부가 위험해서 파주 산골로 피신을 시켰는데 파주는 우리 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민군들이 매일 와서 고모부가 왔으면 알리라고 협박을 했다고 한다. 우리 집도 폭격이 무서워 파주 산골에 가서 아이들은 여름을 지냈는데 우리는 비행기만 뜨면 풀 속에 엎드려 숨었는데, 그곳 사람들은 비행기가 뜨면 구경을 했다. 산골에는 폭격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산골에서 지내는 몇 달이 마냥 행복했다. 도랑에서 가재를 잡고 잠자리 따라 쫓아다니고 산에서 다래를 따고, 외할아버지가 외손녀들이라고 귀여워해 주셨고, 외숙모는 감자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지금도 그때 먹었던 감자떡이 생각이 난다. 그렇게 몇 달 산골에 있다가 집으로 오게 되었는데 우리 집에는 서울에서 사는 친척 숙모님이 피난을 와서 함께 지내고 있었다.

하루는 인민군들이 부산이 곧 해방된다고 하면서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했다고 하는데 우리 숙모는 중국에서 살다가 온 분이라 중국말을 알아들었다고 하는데 인민군 장교들끼리 중국말을 하는 것을 들었는데 전세가 불리해져서 후퇴해야 한다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우리 아버지는 집에서 주무시지를 못하고 여름이라 수수가 키가 많이 자랐으므로 수수밭에서 밤을 지내셨다. 낮에는 인민군들이 민가에 들리지 않고 밤에만 밥을 해 달라고 하면서 민가에 오기 때문에 남자 어른들은 짐꾼으로 데리고 간다고 해서 집에서 주무시지도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탱크가 국도를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고를 며칠을 반복하더니 태극기를 단 지프가 먼저 가고 그 뒤에 군인들이 탄 트럭이 내려가는 것을 보고 몹시 날씨가 더운지라 마을 아줌마들이 모두가 물동이에 물을 담아서 군인 아저씨들한테 물을 주려고 큰길로 가는 것을 보았다. 어린 마음에 태극기가 얼마나 귀한 것이고 자랑스러운 것인지 알았다. 몇 달을 숨죽이고 살았는데 태극기가 보이고 군인들이 트럭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본 그날 이후에는 인민군이 자취를 감추었다. 모두가 후퇴한 것이다.

내가 10살 때인데도 그렇게 잊지 않고 남침이라는 것을 몸으로 체험을 했는데 어느 정신이 이상한 동국대 강 모 교수가 북침이라고 했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국민학교 3학년인 내가 눈앞에서 겪어서 알고 있는 것을 교수라는 사람이,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빨간 물이 들었다고 해도 학생들을 그렇게 가르칠 수 있을까?

나이가 들어 60이 넘어서 교리신학원을 졸업하고 선교사가 되어 군부대에 가서 교리를 가르치고 있을 때였다. 장교가 하는 말이 요즘 집에서 나온 지 며칠 안 되는 훈련병들에게 6.25가 남침이냐, 북침이냐 조사를 했더니 10명 중 8명이 북침, 2명이 남침이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전교조 선생들에게서 그렇게 배웠던 것이다.

전교조라는 조직이 요즘에서야 청문회 때문에 제대로 국민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진보라는 교육감들이 진보성향의 교재를 강제로 선택하게 해서 가르친다는 것을 국회에서 하는 말을 듣고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 훈련병들이 천주교에 종교 행사에 왔을 때 물었더니 남침이냐, 북침이냐 하고 물었더니 정훈교육 시간에 배웠다고 하면서 남침이라고 했다. 단 일주일에 자료를 통해 교육을 시키니까 알 수 있는 것을 어린 학생들에게 쇠뇌했던 것이다. 교수라는 사람이 남침을 정말 몰랐을까? 아마도 알았을 것으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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